7. 임오군란

 

  1880년(庚辰 고종 17) 8월 제2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은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이 준 황준헌(黃遵憲)의 저서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을 고종에게 바쳤다. 조선책략의 내용은 중국과 친하고(親中國), 일본과 맺으며(結日本), 미국과 연결하여(聯美國) 러시아의 남진을 막고 자강부국을 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척양, 척왜의 쇄국정책을 지지하며, 민씨정권에 불만을 품고 있던 유림들이 들고 일어났다. 고종은 유림의 반대를 일축하면서 3군부를 없애고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신설하여 12사가 각기 국가사무를 분장하도록 하는 제도개혁을 단행했다.

 

  1881년 1월에는 조준영, 박정양, 어윤중 등의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일본에 보내 관청의 시설과 제도 및 각종 산업기관을 둘러보고 근대선진기술을 배워오게 했다. 조정이 개혁에 적극성을 띠자 2월에 경상도 유생 이만손(李?孫) 등이 만인연서의 만인소(萬人疏)를 올려 조선책략을 공박하고 김홍집을 규탄했다. 3월에는 황재현과 홍시중이 문호개방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5월에는 김진순 등 경상도 유생, 유기영 등 경기도 유생, 한홍열 등 충청도 유생들이 척왜 상소문을 올렸다. 고종은 5월 15일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발표하면서 김홍집을 파직시키고 상소운동과 유생들의 상경을 막는 강온양면책을 썼으나 별효과가 없었다.

 

  일본에 갔던 신사유람단이 돌아오자 고종은 김윤식을 영선사(領選使)로 하여 69명을 천진에 보내 군사무기제조를 견학하게 하였다. 다시 경기, 강원, 충청, 전라도에서 유생들이 궐기하여 대궐 앞에서 상소를 올렸다. 이제까지는 주로 조선책략과 김홍집을 규탄하고 막연히 척왜를 주장하였으나 그 주장이 점점 강경하고 구체화되면서 쇄국정책을 찬양하는가 하면 집권층 전체와 임금에게까지 개항의 책임을 묻게 되었다. 당시 조정은 민영익을 중심으로 한 민씨들과 개혁소장파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특히 민승호의 양자가 된 민영익은 민규호가 죽은 뒤 명성황후의 비호를 받으며 개혁의 핵심역할을 하고 있었고 대원군은 운현궁에서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민씨정권이 이처럼 중대국면에 처해 있을 때 고종의 배다른 형인 이재선(李載先) 추대 음모사건이 발생했다. 8월 21일 거행되는 경기도 감시(監試)의 초시를 기하여 과거장의 군중을 선동하고, 종로일대에서 장안의 건달들을 동원하여 대원군의 입궐과 임금의 폐위를 단행하고, 척족과 상신들을 타살하며 일본인들을 살해한다는 계획이었다. 이 모의가 8월 28일 광주의 장교 이풍래(李豊來)의 밀고로 발각되어 안기영, 권정호 등 주모자 12명과 연루자 30명이 처형되고 이재선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2개월 뒤 사사되었다. 이 사건으로 열화와 같던 유생들의 척사운동과 대원군의 재등장 움직임이 동시에 꺾이었다.

 

  개항이후 일본은 조선에 소비성 상품을 내다팔고, 곡식과 원료를 사가면서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일본 상인들도 쌀 1섬에 40전에서 45전의 싼값에 산 뒤 일본에서 6원에서 8원에 팔아 엄청난 이익을 남기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많은 양의 쌀이 일본으로 빠져나가게 되자 조선에서는 쌀이 부족하게 되었다. 자연 쌀값이 치솟아 백성은 더욱 궁핍하게 되었고 게다가 큰 흉년이 들어 인심이 흉흉했다(아리랑 참고). 국가의 재정은 바닥이 났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백성은 이중삼중의 조세를 부담해야 했으나, 지방관리들의 착복과 횡령 등으로 국가의 조세수입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이 때문에 중앙관리들에게는 6년 동안 녹봉을 주지 못했고 구식군인들에게도 13개월 분의 급료를 지급하지 못했다.

 

  1882년(壬午 고종 19) 6월 5일 아침 선혜청으로부터 한달 분의 급료를 지급한다는 통보를 받고 도봉소 문전으로 무위 장어 두영에 소속된 구식군인들이 모여들었다. 창고문이 열리고 봉미가 지급되었는데, 태반이 물에 불어 썩은 쌀이었거나 돌이 섞여 있었으며 정량마저 모자랐다. 분노한 군인들이 쌀을 나누어주던 고기지를 구타했고 출동한 군관들에 의해 김춘영, 유복만 등이 체포되었다. 6월 9일 구식군인들은 다시 동요하기 시작했다. 체포된 동료들이 처형될 것이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이들의 구명을 위해 무위대장 이경하(李景夏)가 써준 석방청원 편지를 들고 민겸호의 저택을 찾은 구식군인들은 민겸호의 하인들과 실랑이 끝에 하인들을 때려 죽이고 가구와 집기들을 부숴버렸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군인들은 대원군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대원군을 만난 이후에 이들은 무장을 하게 되었고 계획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조정은 이경하를 파면하고 이재면을 임명하는 한편 선혜청 당상 민겸호와 도봉소 당상 심순택을 파면하였으나, 사태를 수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민씨들의 저택을 부수고 서대문 밖 경기감영을 습격하고, 일본공사관을 불태우면서 숫자가 크게 불어난 군인들은 6월 10일 새벽 창덕궁으로 쳐들어갔다. 목표는 명성황후 였다. 임금의 급명을 받고 대원군이 입궐했다. 뒤이어 부대부인 민씨도 사인교를 타고 들어왔다. 평범한 궁녀의 옷으로 변복한 명성황후는 부대부인의 도움으로 사인교 속에 숨었다. 난군중에 정의길 등이 사인교의 휘장을 찢고 명성황후의 머리채를 잡아 밖으로 끌어냈는데 아무도 왕비를 본적이 없으므로 알아보지 못했다.

 

  이때 무예별감 홍재희(洪在羲 : 나중에 啓薰으로 개명)가 『이 여자는 내 누이 홍 상궁이니 오인하지 말라』며 명성황후를 업고 창덕궁을 빠져 나왔다. 창덕궁을 탈출한 명성황후는 화개동에 있는 전 사어(司禦) 윤태준의 집에 피신하였다가 이날 밤으로 동대문을 벗어나 정릉쪽에서 아침을 맞았다. 날이 밝자 전 승지 조충희가 말을 팔아 바친 돈으로 가마를 세낸 뒤 중랑천을 건너고 망우리 고개를 넘어 한강나룻터에 이르렀는데 민응식과 민긍식, 윤제익, 이용익 등이 배행했다. 배 삯은 명성황후가 끼고 있던 반지로 충당했다. 강을 건넌 일행은 양평에 안씨 집에서 하루 쉬고 여주 민영위(閔泳緯)의 집에 숨었다가 장호원(長湖院 : 지금의 충북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에 있는 민응식(閔應植)의 집에서 환궁할 때까지 머물렀다. 얼마 전까지 명성황후의 생가를 소유하고 있었던 민경진(46. 여주읍 능현리)씨는 할머니로부터 임오군란때 피난 내려온 명성황후가 능현리에서 1주일정도 머물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임오군란 중에 민겸호, 김보현, 이최응, 일본교관 호리모도 등이 살해되고 민치상, 민영익, 김홍집의 저택 등 40여 채가 파괴되거나 불탔다. 고종은 입궐한 대원군에게 사태수습에 관한 전권을 위임하고 대소의 공무를 모두 대원군에게 품결(稟決)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대원군은 『왕비께서 10일 오시(午時) 경에 난군중에서 이미 승하하신바, 다만 그 체백(體魄: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 모든 군졸들은 퇴산하라』는 내용의 교지를 선포케 하여 국상(國喪)을 공식화하고 군인들을 해산시켰다. 대원군은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여 3군부를 부활시켰고 무위영 대신 훈련도감을 다시 세웠다. 민씨 친족과 친일세력이 숙청되고 대원군 측근들이 등용되었다.

 

  그러나 6월 29일 임오군란 중에 입은 피해보상을 요구하며 일본군대가 인천에 상륙했고 7월 7일에는 일본공사 하나부사가 2개 중대병력의 호위를 받으며 거만하게 임금을 알현했다. 청나라는 이번 군란의 중재역을 자임하면서 7월 7일 4천명의 병력을 남양만 마산포로 보냈다. 이어 7월 21일 병력을 동대문 밖 종묘에까지 진출시켰다. 일본과 청나라의 무력 앞에서 대원군도 속수무책이었다. 청나라와의 무력충돌을 꺼린 일본이 중재를 요청하자 청나라는 조선의 보호자 행세를 하면서 완강히 저항하는 대원군을 7월 31일 납치하여 청나라의 보정부(保定府)에 유폐시켜 버렸다. 대원군이 다시 실각하고 임오군란 발발 이후 50여일만인 8월 1일 장호원에 있던 명성황후는 영의정 이하 대신들과 청군의 호위를 받으며 창덕궁으로 되돌아 왔으나 조선은 조금씩 조금씩 외세에 의해 허물어지고 있었다.

 열강의 개입

 

명성황후 - 세자비의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