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홍릉

 

  1895년 8월 20일 아침.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의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대원군과 미우라공사는 건청궁 장안당(長安堂)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고종과 만났다. 이들은 이번 변란이 궁중을 숙청하고 국무의 책임을 정하여 갑오개혁 이래의 정책을 올바르게 시행하기 위함이었다고 밝히면서, 앞으로 대원군이 임금을 보익하여 궁중을 감독하고 정무의 책임은 내각이 맡을 것이라고 고종에게 알렸다. 이날로 친일파들이 대거 기용된 내각이 구성되었다. 22일에는 명성황후의 폐서인 조칙이 발표되었으나, 23일에 왕세자의 효성과 정리를 특별히 생각하여 폐후 민씨의 빈호(嬪號)만은 복위한다는 내각의 발표가 뒤따랐다. 한편 고종을 알현하고 나온 각국 공사들은 이번 사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의견을 공동으로 발표했다.

 

  ① 지난 20일 사변의 진상에 관하여 각국 사신들이 들은 바에 의하면 조선정부가 말하는 내용과 다르다.

  ② 그러므로 변란의 주모자 등을 가려내서 엄벌에 처하기를 바란다.

  ③ 명성황후의 폐위조칙은 고종의 의사에 의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이어 미국과 러시아 공사는 인천에 있던 각기 20여명 안팎의 육전대를 입경 시켰다. 당황한 일본은 27일 고무라(小村壽郞太)를 필두로 한 조사반원을 조선에 파견하였고 29일 미우라공사의 귀국을 명령하는 동시에 혐의자 48명을 일본으로 소환하여 조사를 시작했다. (일본은 9월 9일 미우라 등 4명을 흉도소집 및 모살혐의로 구속했다가 춘생문(春生門)사건이 일어나자, 1896년 1월 21일 흉도 48명 전원에게 증거물충분의 이유로 면소처분을 내려 전원 석방했다) 그러나 조선정세는 이런 정도의 조치로 가라앉지 않았다. 조선에 주재하고 있는 구미열강의 공사들도 조선의 친일내각을 불신하고 있었다. 이를 감지한 일본은 구미열강과의 타협을 모색하고 친일내각의 붕괴를 막기위해 9월 11일 자진해서 일본군을 철수시킬 것과 조선정부에 간섭하지 않을 것임을 미 영 러 독 불 등의 공사들에게 알리고, 9월 13일 훈련대의 해산을 내각을 통해 발표케 했다. 일본이 수그러드는 기미를 보이자 고종은 10월 10일 명성황후 위호(位號) 복위의 조칙을 내리고, 지난번 사변에서 훈련대는 무죄임을 선포하여 훈련대 해산을 반대한 조선 군인들이 대원군을 앞세워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처럼 호도하려던 일본의 음모를 분쇄했다. 명성황후의 복위는 러시아공사 웨베르를 비롯한 각국 공사들의 협력에 힘입은 바 컸으므로 고종은 수십 명의 외국공사와 영사, 그리고 정부의 각료 등을 궁중에 불러모은 자리에서 복위조칙을 선포하였다. 15일에는 명성황후의 시해 사실을 백성에게 알리면서 국상을 정식으로 반포했다.

 

  이후 조선은 단발령, 전국적인 의병봉기, 아관파천 등으로 걷잡을 수 없이 떠밀려 가게 된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미루어오던 명성황후의 국장이 다시 논의된 것은 1896년(丙申 建陽 1 고종 33) 9월 이었다(1896년 1월 1일부터 양력이 사용되었다)9월 25일 총호사로 임명된 조병세는 장지를 선정하기 위해 여러 곳에 지관을 파견했다). 1897년 1월 6일 의정부는 명성황후의 시호를 문성(文成) 능호를 홍릉(洪陵), 전호를 경효(景孝)로 정했다(명성황후의 시호는 3월 2일 명지(明智)와 성덕(成德)에서 따온 명성으로 개칭되었다). 장지는 청량리로 선정되었다. 명성황후의 유해는 시해직후 경험 많은 늙은 환관에 의해 추려져 태원전(太元殿)에 이빈(移殯) 하였다가 1896년 7월 경운궁의 경효전에 모셔두었었다. 국장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환궁한 뒤에 거행키로 했다.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경운궁(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뒤 궁호를 덕수(德壽)라고 정했으므로, 경운궁은 나중에 덕수궁이란 칭호로 바뀌게 된다)으로 환궁하였으나 복잡한 국내정세로 국장은 다시 연기되었다. 1896년 7월 2일 결성된 독립협회의 간청을 받아들인 고종은 10월 3일 칭제(稱帝)할 것을 선포하고, 10월 11일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결정했다. 12일 원구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를 드리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날 왕후는 황후로 왕태자는 황태자로 개칭되었다. 황제즉위식이 끝나자 국장준비는 빠르게 진전되었다. 28일 국장당일에 쓰일 1천 1백 쌍의 등롱이 도로연변에 걸리고 30일에는 경무사 이봉의가 산릉 행렬의 총책임자로, 내부대신 남정철이 국장날 응접을 맡기로 결정되었다. 11월 8일 국장도감제조에 김규홍, 산릉도감제조에 이정로가 임명되었다. 한성판윤 이채연과 양주군수 임원호는 산릉의 토목공사를 감독하였다.

 

   명성황후가 죽은지 2년이 지난, 1897년 (丁酉 光武 1 고종 34) 11월 21일 오전 11시, 마침내 명성황후의 유해가 유택인 홍릉을 향해 인화문(仁化門)을 나섰다. 수많은 명정과 홍전 등을 앞세우고 1개 대대의 친위대가 선두에 섰으며, 상여 뒤에는 황제와 황태자가 36명이 메는 가마를 타고 뒤따르고, 1백 여명의 외국사신, 3백 여명의 당상관, 3천 여명의 군인들과 전국 각지에서 상경한 지방관들이 줄지어 뒤를 이었다. 국장행렬은 여사군(與士軍)과 빈객수만도 2만 명이 넘었는데 길이가 무려 30리에 뻗쳤다. 행렬의 선두가 종로와 동대문을 지나 청량리 임시 행재소에 거의 다다를 무렵인 오후 2시경 명성황후의 죽음을 애도하는 듯 맑게 개었던 하늘이 천둥과 함께 비를 뿌렸다. 연도를 가득 메운 백성들은 추위 속에서도 흩어지지 않고 통곡과 슬픔 속에 명성황후의 마지막 길을 지켜보고 있었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한 뒤 명성황후는 고종과 함께 경기도 금곡(金谷) 홍릉에 함께 묻혔다.)

 

잊어서는 안될 것들

  명성황후 44년의 생애를 주마간산격으로 일별해 보였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 할지라도 명성황후가 중심이 되지 않았으면 과감히 뛰어 넘었다. 초점은 명성황후였기 때문이다. 명성황후의 숨결이 배어 있는 사건과 시간의 풀숲을 헤치면서 들은 것은 놀랍게도 그녀를 폄훼(貶毁)하는 비난의 목소리였다. 그 소리는 그녀와 함께 태어나 지금껏 살아있다. 그러기에 명성황후를 평가하기에는 시간이 이른지도 모른다. 객관적인 시각들이 좀더 보편화 될 때까지 아니 주관적 평가의 기준들이 좀더 다양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아직 명성황후를 옹호하는 목소리는 크게 들리지 않으니까 말이다.

  조선 말기의 당시, 전세계는 미지의 세계로 뛰어들어 토지와 식민지를 개척하고, 근대적인 대포를 장착한 거대한 군함을 만들어 침략을 일삼는 일이 다반사였으며, 일본도 명치유신이래 신학문을 받아들여 많은 발달을 했었다. 그러나 조선은 영조, 정조를 정점으로 점차 내리막길에 들어서서, 허약하고 허수아비인 왕들을 만든 안동김씨의 부패속에서 이미 멸망의 길에 들어서고 있었다. 고종이 등극하고 흥선대원군의 초기 정책은 적절하였었다. 그러나 최고의 자리에 있으면 주위를 잘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무시하게 되며, 본인 위주의 독단적인 생각만이 옳게 여겨진다. 최고의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는 많은 것을 희생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승리하지 않으면 죽음뿐이다. 현재도 여러 정치가들은 열렬히 밀어준 국민에 대하여 처음에는 국가를 위하여 헌신하고자 한다. 그러나 점차 그런 영광을 잊고, 독선적인 생각을 당연히 여기며, 자기 위주로 정책을 펼쳐나가려고 한다. 인간의 끝없는 야욕으로, 최고권력자는 나갈 때는 미련을 두지말고 떠나갈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인물인 것이다. 대원군이 10년 섭정을 끝내고, 조용히 물려주었으면 어떠했을까? 물론 반대로 대원군이 계속 섭정을 하고, 명성황후가 절대 복장하는 위치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조선은 하루하루가 지탱하기 힘들고,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수 많은 변화 속에서 열강의 각축장이 된 한반도에서 흥선대원군의 집권 야욕과 부딪친 명성황후와의 권력투쟁은 더욱 나라를 어지럽게 하였다. 만일 흥성대원군의 집착만 없어도 임오군란도 크게 번지지 않았을 것이고, 명성황후의 시해사건도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허약한 조선은 외국의 힘을 빌려 동학혁명, 임오군란 등을 진압할 수 밖에 없었고, 청, 노, 일의 하려는 열강 속에서 선택적인 것은 오랑케의 힘을 이용하여 오랑케를 물리친다는 이이제이(以已制以)라는 외교적 수단으로 연명하는 것이었다. 특히 야욕이 가장 큰 일본 앞에서 풍전등화의 위기를 벼텨 낼 방법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조선은 너무 늦게 개방되어 서양의 변화를 받아들이기에는 벅찼고, 억압적으로 개방된 상황에서 경험 없는 대처 방법은 대외무역의 손해, 급격한 서양문물과 제도의 도입에 따른 혼란, 일제의 침략 야욕, 국내적으로 권력투쟁, 계속적인 대원군의 도전, 고종의 대를 이을 원자에 대한 명성황후의 노심초사, 봉건체제의 붕괴조짐,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혁명, 청일전쟁 등 정말 정신없는 세월속에서 마지막까지 조선을 일구어 보려던 풍운의 명성황후는 일제의 칼날 앞에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명성황후의 평가여부는 접어두더라도 오늘 우리는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명성황후가 비운에 쓰러진지 1백년, 그녀를 쓰러뜨린 일본이 물러간지 50년이 지나고 이제 새로운 세기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는 이 해에 우리 현재의 모습을 진지하게 되돌아보고 우리 자신을 추스르는 일 바로 그것이다. 명성황후가 살아있던 1백년 전 그때처럼 중국은 내부의 일로 부산해서 밖을 볼 겨를이 없고, 일본은 반성 없이 영악한 저울질을 계속하며, 기타 이해관계국들은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반성하지 않은 민족에게 역사는 비슷하게 유전된다고 하니 어찌 두렵지 아니한가! 일본은 겉으로는 웃으면서 한편으로는 우리를 얕잡아 보고 있는 것이다. 세계대전 속에서 일본은 참혹한 만행을 수없이 하였으며, 일찍이 일본같이 과거의 잘못에 대하여 진실한 반성을 하지 않는 국가는 없고, 심지어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정한론의 유전을 두려워 하고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될 것이다.

  인간이란, 흘러가는 세월속에 중요한 사실들을 망각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두기 마련이다. 그러나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국운의 굴절에 휘말려 원한의 사실마저 잊어버릴 수 없듯이 명성황후의 참극을 우리 민문은 물론 모든 국민이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난 81년 11월 10일, 각계층으로 구성된 명성황후 추모사업추진 위원회에서는 순국장소에 순국비를 세웠으며 매년 10월 8일 이면 여성단체인 예림회가 주동이 되어 추모행사를 벌리고 있다.

 

   참고  http://home.hanmir.com/~sakk/critic/myungsung.htm

           http://www.dramaschool.net/index.asp

           http://www.netuni.net/course/course_detail_n.asp?code_a=KR&CourseHistoryCode=HSA90009F

           http://211.251.231.70/study3/교과서속인물/html/person/p161_10938.htm

 

 홍릉(洪陵) - 제26대 고종과 명성황후

 

 

   우리 나라 역사상 마지막으로 조영된 왕릉인 것이다. 홍릉은 지금까지 돌아보던 여느 왕릉들과 그 모습이나 형식이 많이 다르다. 1897년에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 왕릉 황제라 일컬었던만큼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따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한다면 홍유릉은 왕릉이 아니라 황제의 능인 셈이다.

 

   홍살문 안으로 마주 보이는 건물은 침전, 고종황제의 신위를 봉안한 제전이다. 다른 능에서 보던 것들과는 그 모양이 다르다. 정(丁)자 모양의 정자각 대신 정면 5간 측면 1간의 일자형 건물인 것이다. 침전보다 더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홍살문에서 침전까지의 길에 나란히 선 석물들이다. 침전에서 가까운 것부터 문인석, 무인석,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 말 순서이다. 말이라고 하는데, 잘 구분이 안된다.

 

  문인석과 무인석도 다른 능들과는 좀 다르게 생겼다. 문인석은 건릉(정조와 효의왕후의 능), 수릉(익종과 신정왕후의 능)처럼 금관을 쓰고 있으며 키가 385Cm나 돼 왕릉의 문인석들 중에서 가장 크고, 문무인석 모두 성장을 강조하여 섬세하게 조각되었다. 문인석, 무인석, 석수들이 모두 침전 앞으로 나가 봉분 주위는 침전의 웅장함에 비해 단촐해 보인다. 현종 이후 보이지 않던 병풍석이 화려하게 등장하여 봉분을 감싸고 있으며, 그 주위에 화문으로 장식한 난간석이 둘려져 있고 봉분 앞에는 고석으로 괸 상석과 양쪽 옆에 망주석, 앞쪽에 사각의 장명등만 서 있다.

 

  고종의 능을 이곳 미금시에 만들면서 천장론이 일던 민비의 능도 함께 모셔와 1919년 3월 4일 서향 언덕에 합장하여 장사지냈다.

 

<홍릉 가는 길>

    망우리고개를 넘어 경춘가도를 달리다 보면 미금시(남양주시)를 벗어나기 전에 홍유릉 표지판을 발견할 수 있다. 표지판에 씌어 있는 대로 화살표를 따라 오른쪽으로 차를 돌리면 금방 능 입구가 보인다. 청량리역 앞에서 가는 버스도 있으므로 교통편은 편리하다. 서울 시내에서 승용차로는 40분, 버스로도 한 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바로 옆에 금곡역이 있어 경춘선을 이용할 수도 있지만 비둘기호만 서는 작은 역이라 기차시간을 맞추기가 까다롭다.

 

  참고 :  http://my.dreamwiz.com/dynasty4/history/왕릉/개별왕릉/고종명성홍릉.html

 

명성황후 순국추모 비문

 

  아아 세계만방 역사 속에 어찌 이같은 분통한 일이 있으랴. 우리 겨레 모두는 천만년이 지나도 이 면면한 한을 잊을 수 없다. 이곳 녹산은 조선왕조 26대 고종 황제의 배위되시는 명성황후 민씨께서 불공대천의 원수 왜적의 손에 처참하게도 순국하신 곳이다. 1894년 갑오경장이 지난 뒤, 1895년 을미 10월 8일(양력) 새벽에 왜제의 사주를 받은 왜인 폭도들은 총칼을 휘두루며 무엄하게도 궁성을 포위하고 곤녕합 으로 침입하여 황후를 시해한 후 다시 이불에 옥체를 싸서 이곳에 옮겨놓고 석유에 불을 질러 시신마저 없에 흔적조차 없게 하였다.

  아아, 하늘도 무심하다.인류 역사상에 어찌 이러한 만행이 있으랴 항상 동양 평화를 가장하는 저들이 전쟁도 아닌 터에 남의 나라 궁중으루 쳐들어 와서 구고를 사살하는 일이 있을수 있는가, 옛일을 생각하면서 이곳 녹산에 오르니 주먹으로 가스을 쳐 울분하면서, 어서 어서 우리의 힘으로 세계 제일의 부국강병의 나라를 이룩하겠다는 마음 더욱 간절하다.

 

   명성황후께서는 지나치도록 초영 영리하신 여걸이셨다. 황후가 되신 후에 항상 [춘추좌전]을 공부하여 정치와 역사를 연구하셨다. 갑오경장을 전후하여 쇄국정치에서 문호개방이 되니 동북아세아의 요새지대인 우리국토는 마치 이리떼들이 침은 흘리는 고기덩이와 같았다. 이중에서도  이웃나라 중국,로국, 일본은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각축전을 버렸다. 영특한 명성황후는 탁월한 외교수단으로 이이제이의 정책을 써서 용이하게 왜국에게 이권을 주지 아니했다. 왜적은 앙앙불락해서 마치내 우리 구고를 사살한 후에 이등바운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해서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했고, 다음 다섯해 후에는 경술합방을 선포하여 마침내 망국의 비운을 당하게 되었다. 만약 명성황후께서 왜적의 손에 시해되시지 아니했던들 당시의 나라형세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명성황후 순국숭모비 건립위원 일동은 황후께서 가신지 84주년을 맞이하여 황후의 애절하신 순국을 추모하면서 비를 세워 이 사실을 천만대 젊은 분들에세 전한다.

          

1979년 10월 일 월탄 박종화

배한진기자 bhj@munhwa.co.kr

 

                                명성황후탄강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碑)

 

 ▒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41호

 ▒ 지정일 : 1973.7.10

 ▒ 시대 : 조선말 (1904년)

 ▒소재지 :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250-2

 ▒ 규모 : 250cm×64cm×45cm

 ▒ 재료 : 화강암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비 명성황후 민씨(1851~1895)의 생가옆에 명성황후가 어렸을 때 공부했다는 방이 있었던 자리에 그녀의 탄강을 기념해 세운 비이다. 명성황후는 1851년(철종 2) 여주에서 태어나 1866년(고종 3년) 왕비로 책봉된 뒤 조선 말의 격동기를 보내다가 1895년 일본자객에 의해 시해되었다. 1897년 명성황후로 추봉되고 1904년 여주의 생가에 이 비가 세워졌다.

  비 앞면에는 「명성황후탄강구리(明成皇后誕降舊里, 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 마을)」이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광무팔년갑진오월일배수음체루경서(光武八年甲辰五月日拜手飮涕淚敬書, 광무 8년 갑진 오월 어느날 엎드려 눈물을 머금고 공경히 쓰다)」라고 새겨져 있다.

 

비의 높이는 250cm, 폭 64cm이며 비각정은 측면 각1칸(1.4평)에 익공양식이며, 팔작지붕이다. 필자미상이나 고종과 명성황후의 둘째 아들로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의 글씨로 추측된다.

http://yeojugun.nonghyupi.com/good/area_culture/index07.htm

 명성황후의 시해

 

수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