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명성황후의 시해

명성황후 시해 관련 일지

   7월 25일 청일전쟁 개전
   10월 15일 이노우에 가오루, 주한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됨
   11월 20일 이노우에, 고종에게 내정개혁안령 20개조 요구
   4월 17일 일본의 청일전쟁 승리를 공식화한 시모노세키조약 체결
   4월 23일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3국 간섭’ 시작
   5월 5일 일본, ‘3국 간섭’에 굴복해 랴오둥 반도 반환 동의
   5월 28일 친일 성향의 2차 김홍집 내각 붕괴
   6월 5일 무쓰 무네미쓰 외상, 사이온지 긴모치 문부상에게 업무 위임하고 요양 떠남
   6월 20일 이노우에, 정부와 협의차 일본 도착
   7월 2일 이노우에, 일본 각의에 기증금을 미끼로 명성황후 회유책 제안
   7월 5일 아오키 슈조 주독일 일본 공사, 3국 간섭이 ‘매장만 남은 시체’라고 보고
   7월 6일 박영효 내무대신 조선에서 실각
      러시아, 대청차관 협정에서 독일을 배격, 3국협력 붕괴
   7월 7일 박영효, 일본으로 재망명
   7월 8일 야마가타 아리토모 대장,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편지를 요양 중인 무쓰 외상에게 보냄
   7월 10, 11일 이노우에, 무인 출신 미우라 고로를 자신의 후임으로 천거
      명성황후 회유에서 제거로 일본 정부 정책의 전환을 의미
   7월 14일 이노우에, 한국으로 떠나며 “한 달도 안돼 돌아올 것” 이라며 기자회견
   7월 22일 미우라, 주한 일본전권 공사로 내정
   9월 1일 미우라, 주한일본공사 부임
   9월 17일 이노우에, 미우라에게 업무 인수 인계 후 서울 출발
   9월 21일 미우라, 아케치 겐조 한성 신문 사장에게 ‘여우사냥’ 운운
   10월 8일 미우라, 일본군과 일본 낭인 이끌고 명성황후 시해
   2월 11일 고종, 아관파천 단행



  동학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조정은 청나라에 출병을 요청했으나, 천진조약의 규정에 따라 일본군대도 조선에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은 용산에 주둔하고 있던 1개 연대규모의 병력을 동원 경복궁을 포위하고 장안의 4대문을 접수했다. 대궐로 돌아온 일본공사 오오또리(大鳥圭介)는 고종과 명성황후를 위협해서 대원군을 불러들이게 했다. 25일 일본이 말하는 소위 『조선왕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내정개혁』의 일환으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설치되면서 강요에 의한 갑오개혁이 시작되었다. 군국기무처는 28일 『의정부가 백관을 거느리고 서정을 다스리며 국가를 경영한다』는 관제의 개혁을 결의했다. 왕권이 유명무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이 개혁의 결의에 참여했던 김홍집(金弘集)은 『오백년 조종(祖宗)의 구제도를 신(臣)의 손으로 변혁했으니 뒷일이 매우 두렵습니다』라고 고종에게 아뢰었었고, 영돈녕부사 김병시는 『군주가 욕된 일을 당하면 신하가 죽음으로써 보은해야 한다는 대의를 저버리고 있으니 한스럽기 짝이 없다』면서 눈물을 흘리자 『임금의 얼굴에 슬픈 빛이 떠오르고 곁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머금었다』고 갑오실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무렵 이또오히로부미(伊藤博文)가 주재하는 일본 각의(閣議)는 외무대신 무쓰가 상정한 4개 항목의 대조선 정략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국가의 운명은 이미 일본의 손에 있엇던 것이다. 그 내용은 조선을

  1. 독립국으로 공인하자는 안(案),

  2. 일본의 보호국으로 하자는 안,

  3. 일 청 공동보호국으로 하자는 안,

  4. 벨기에, 스위스 같은 중립국으로 만들자는 안이었다.

 

  일본은 결국 두 번째 안을 채택하였다.

  - 7월 20일 잠정이라는 미명아래 조선에서의 중요한 권익을 점유하는 조일잠정합동조관(朝日暫定合同條款)을 채결했다.

  - 7월 26일 청일전쟁에 조선은 일본군대의 진퇴와 식량 등의 편의를 재공해야 한다는 공수동맹(攻守同盟)을 강요, 조선이 청나라에 적대적인 위치에 서게 만들었다. 이에 형조참의 이남규(李南珪)는 청절왜소(淸絶倭疏)를 올려 일본의 교활한 사술을 지적하면서 조약을 폐기하고, 열국과 힘을 합쳐 일본을 토벌할 것을 주장하여 이 시기의 민심을 대변하기도 했다.

  - 9월 28일 신임 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馨)가 부임했다. 그는 갑오개혁이후 왕권이 무시 당해온 점을 인정하면서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접근했고, 청나라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대원군을 문책, 10월 21일 대원군을 정계에서 은퇴케 했다. 이후 『왕실이나 세자에 대한 걱정만 없다면 여자의 몸으로 왜 정치에 가담하며 척족을 기용하려 하겠는가』라고 말하는 명성황후와 조선을 마음대로 전단하려는 이노우에는 자주 마찰을 일으키며 1895년을 맞게 된다.

 

   갑오정변의 실패로 조선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일제는 세력만회를 위하여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명성황후는 이미 기울어져가는 조선에 대하여 막강한 열강을 상대로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으로 다른 나라로부터 살아 남고자 하였다. 1894년 조선지배에 관한 청.일의 간축전은 드디어 청.일 전쟁을 이야기시켰으며, 그 결과는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다. 일제는 전리품으로 1895년 3월 23일 청 나라와의 강화조약에 의해 시모노세키 조약(하관조약; 下關條約)을 체결하여 랴오둥(요동) 반도를 얻게 되었다. 그러자 극동에서 남하정책을 펴던 러시아가 일본의 팽창을 염려하여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요동반도를 청에 돌려주라고 압력을 넣었다. 이른바 '삼국간섭'이다. 1895년 5월 초순의 일로서 결국 일본은 요동반도를 포기하여야 했다. 이 소식을 듣고 가장 기뻐한 사람은 명성황후였다. 명성황후는 고종과 자신을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입헌군주로 만들려는 일본의 계획에 반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청일 전쟁 후 막강 해진 일본의 세력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왕실과 세자가 없다면 부녀자의 몸으로 정치에 관여하며 척신을 기용할 이유가 있겠는가? 귀하의 진언을 믿고 금후로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주한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약속한 뒤였다. 이런 명성황후에게 삼국간섭의 소식은 가뭄 끝의 단비처럼 달고 시원했다. 그는 청나라가 조선에서 손 뗀 지금, 자신이 의지할 곳은 간섭을 주도한 러시아뿐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즉시 정치활동을 재개하여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을 추진했다. 박정양, 이범진, 이완용을 중심으로 하는 친러내각을 출범시키고, 은신중이던 민영환을 비롯해 민씨 척족 16인을 불러들였다. 1895년 7월의 일이다. 곧이어 명성황후는 1894년 6월 이후 일본이 적극 지원해 온 조선의 내정개혁(갑오개혁)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고종은 『작년 6월(갑오경장)이래 칙령이나 재가사항은 어느 것이고 짐의 의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를 취소한다』고 선언하였다. 이어 5월 20일 앞으로는 임금 자신이 매일같이 정부의 대산들과 접촉하여 대소의 정사를 심의 결정하고 친재한 다음에야 실행토록 할 것이라는 조칙을 발표했다. 이 조처는 왕권회복과 일본지배의 거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칙령 제1호를 공표하여 관복을 옛날식으로 환원시켰으며, 친일인사를 모두 내쫓고 친미,친러파로 자리를 채웠다. 그리고 일본군 휘하에 들어 있는 훈련대를 해산시키고자 했다. 이같은 일련의 조치는 일본의 조선 보호국화 계획에 중대한 차질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다.

 

  일제는 30년간 정한론을 펴왔고, 요동반도의 할양권의 포기로 인해 정부에 대한 성토가 비등하였고, 조선에서 러시아에게 주도권을 빼 앗길 것을 우려하였다. 청나라는 싸워 이겼지만 러시아와 일전을 치르기엔 아직 역부족이라고 판단한 일본은 '친러'의 중심인물인 명성황후를 제거 하기로 했다.  이러한 일제의 천인공노할 만행의 계획하에 7월 13일 이노우에 후임으로 미우라(三浦梧樓)를 부임시켰다. 미우라는 이노우에와 같은 고향사람으로서 예비역 육군 중장출신이며 군공을 인정받아 자작(子爵)이 된 일본궁정의 고문으로 있었다. 미우라는 『한 몸을 희생할 결심으로 부임한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털어놓았다 한다. 신임장 봉정을 위해 고종은 배알할 때는 단지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이 땅의 풍월이나 즐기면서 명성황후께 관음경의 일부를 청사(淸寫)하여 드릴까 한다』는 말뿐이었다. 교묘하게 고종과 명성황후를 안심시킨 미우라는 8월 2일경 명성황후 시해계획을 구체화했다.

 

 - 첫째 궁중의 간신을 제거하여 국정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아래 대원군을 입궐시키고 명성황후를 시해한다.

 - 둘째 행동부대의 표면에는 훈련대를 내세워 조선인이 일으킨 쿠데타를 가장한다.

 - 셋째 행동의 전위대로는 일본 낭인부대를 앞세우고, 이들을 위한 엄호와 전투의 주력은 일본군수비대가 담당한다.

 - 넷째 대원군 호위의 별동대로는 일본인 거류지의 경비를 담당하는 일본경관을 동원한다는 내용이었다.

 

  거사에 참가할 병력은 일본낭인 30여명, 경찰 10여명, 조선군훈련대, 일본군수비대로 구성했다. 당초 거사일은 1895년 음력 8월 22일(양력 10월 10일) 새벽 4시 30분이었으나, 조정에서 8월 19일 일본군이 교육해 온 조선인 훈련대의 해산을 결정하고, 20일 무장해제를 단행하겠다고 미우라에게 통보해오자, 시해계획은 8월 20일로 앞당겨지게 되었다.

  1895년(乙未 고종 32)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운명의 날은 시작되었다. 새벽 5시 30분쯤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이 군부대신 안경수와 함께 1개 중대의 시위대 병력을 이끌고 광화문을 들어오는 흉도들과 첫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10분만에 홍계훈이 전사하고, 안경수와 시위대 병력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했다. 두 번째 접전은 미국인 교관 다이(Dye) 장군이 지휘하는 시위대와 일본수비대 사이에 있었으나 시위대는 총 한번 변변히 못 쏘고 패주했다. 흉도들은 두 패로 나뉘어 건청궁(乾淸宮)으로 들어왔다. 동쪽 곤녕전에는 고종과 왕세자가 있었고, 서쪽 옥호루(玉壺樓)에는 명성황후가 있었다. 옥호루에 난입한 흉도들은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을 살해하고, 비명을 지르는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 칼을 들이대고 명성황후의 소재를 물었으나 찾을 수 없자 용모와 복장이 우아하여 황후라고 생각되는 여인을 3명이나 살해했다. 이 참혹한 장면을 미국인 교관 다이 장군과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이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때 이미 명성황후는 누군가의 칼에 시해되고만 뒤였다. 명성황후의 시해장면을 왕세자의 목격담이 담긴 미국 공사관의 보고와 사바틴의 증언을 토대로 한 영국 영사의 보고를 근거로 하여 구성했다.

 

  『흉도들이 명성황후의 침실로 향하자 궁내부 대신 이경직은 서둘러 황후에게 변란을 알렸다. 황후와 궁녀들이 잠자리에서 뛰쳐나와 숨으려는 순간 흉도들이 달려들었고, 이경직이 황후를 보호하고자 두 팔을 벌려 가로막다가 양 팔목을 잘려 피를 흘리며 죽었다. 이 틈에 황후는 뜰 아래로 뛰어나가다 흉도들에게 붙잡혔으며, 흉도들은 수 차례 황후의 가슴을 내리 짓밟으며 칼로 거듭 황후를 찔렀다. 실수 없이 해치우기 위해 황후와 용모가 비슷한 여러 궁녀들도 살해되었다. 그때 여시의가 앞으로 나서 손수건으로 황후의 얼굴을 가렸다』곤녕전에 있었던 고종도 흉도들이 난폭하게 잡아끌어 옷이 찢겼고 왕세자는 부상을 입었다. 민태호의 딸이며 민영익의 동생이었던 왕세자비도 이 현장에 있었는데, 명성황후를 보호하다가 넘어져 반나절이나 기절해 있었으며, 이때 다친 허리가 평생 고질이 되었다 한다. 술에 취한 몇몇 흉도들이 죽은 궁녀들을 시간(屍姦)했다는 보고도 있다. 명성황후의 시신이 능욕(凌辱)을 당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일본측의 조사기록을 보면『죽은 명성황후의 얼굴이 너무 젊어(20대 중반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젖가슴을 살펴보고 확인했다』고 되어 있다. 명성황후는 죽어가면서 왕세자의 이름을 세 번씩이나 불렀는데, 왕세자도 이를 들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흉도들은 명성황후의 시신을 녹원(鹿園) 숲속으로 운반한 뒤 장작더미 위에 시신을 올려놓고 불을 질렀다. 계속 석유를 뿌려가며 뼈만 남을 때까지 반복했다. 1895년 8월 20일 오전 8시경이었다. 어찌 세계역사에 다른 국가의 왕비를 이토록 잔인하게 살해할 수 있겠는가? 오직 야만스러운 일본뿐일 것이다. 조선을 착취에 이용했으면서도 조선에 도로와 철도 건설 한 것을 자랑하고 있으며(소설 아리랑 기행문 참고), 조금도 진실된 반성을 하지 않는 나라는 일본뿐이 없다.

 

  이로서 밀려오는 외세에 당당히 맞서며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일으켜 보려던 비운의 여인 명성황후는 파란만장 했던 생을 마감했다. 이때 나이 44세였다. 대원군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기 위한 각본에 따라 대원군을 궁궐로 데려오기 위해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가 이끄는 무장한 일본인 30여명이 대원군이 사는 공덕리에 도착한 것은 19일 자정께, 대원군이 집을 나선 것은 이로부터 세 시간이 넘은 20일 새벽 3시 30분경이다.  대원군을 끌어내는데 너무 시간을 지체하고 또 일본인 수비대와 합류하기 위해 1시간 반 이상을 더 기다린 탓에 어둠 속에서 완전범죄로 해치우려던 왕비 시해 계획은 어슴푸레한 새벽녘에 이루어졌고 목격자들이 많이 생겼다. 때문에 미우라는 '대원군과 훈련대 주모'라는 처음의 주장을 '일본인이 가담했다 해도 이는 자신과 일본 정부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로 바꾸고, 그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 짓기 위해 외교채널과 언론을 총동원했다. 강경한 태도로 진상규명을 요구하던 미국, 러시아, 영국 등 각국 공사들도 일본과의 관계악화를 우려하는 본국정부의 방침에 따라 차츰 침묵을 지키게 되었다. 



⊙ 누가 명성황후를 시해했는가?

  현재 학계에서 나오는 견해는 대원군과 훈련대 주모설, 미우라 주모설, 이노우에 가오루 주모설로 대별된다고 할 수 있다. 대원군과 훈련대 주모설은 대부분 일본 역사가들의 입장으로 일본의 책임회피 및 사건은폐의 의도로 주장된 것이다. 또한 대원군이 명성황후 시해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미우라 주모설 역시 당시 일본 공사였던 미우라의 사건 개입여부가 누가 보더라도 자명해진 상태에서 미우라의 개인적인 공명심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함으로써 그 배후에 대한 인식을 흐리게 하고 일본의 사건 배후조작설을 강하게 부인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노우에 주모설은 실제로 범죄를 실행한 미우라의 범행동기의 허구성을 밝히고, 일본정부를 배후로 이노우에와 미우라의 공모에 의해서 명성황후가 시해됐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대원군은 일본정부의 사건은폐 및 조작을 위해 동원된 허수아비에 불과하고 미우라도 일본의 대한정책의 변화에 따라 실행에 옮긴 청부 살인업자일 뿐이며 실제로는 일본정부의 강력한 후원하게 있었던 이노우에가 주모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이노우에 주모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우선 미우라가 조선공사로 부임(9월1일)한지 37일 만에 사건이 일어났고, 특히 이노우에가 외교관례를 무시하고 공사관에서 17일간이나 함께 있으면서 업무를 인계하고 조선을 떠난지 20일만에 사건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미우라는 일본 예비역 육군중장으로 조선문제에 전혀 관여한 적도 없었는데, 이러한 그가 조선사정을 제대로 익힐 겨를도 없이 37일 만에 민비시해라는 국운이 걸린 사건을 계획부터 실행까지 독단적으로 주모하였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시해를 위한 세부계획이 이노우에가 조선을 떠난 직후부터 가시화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미우라는 이노우에의 정책을 수해한 종범 내지는 현지 행동책임자에 불과하고, 주모자는 어디까지나 이노우에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일본 내각의 관련 자료

日정부 명성황후 시해 개입 물증 111년 만에 ‘햇빛’

"별첨한 글을 보고 실로 경악해 마지않았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확실한 것은 세외(世外) 백작을 즉각 도한(渡韓)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내주신 가르침대로 내외(內外)에 대해 방관좌시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각의에서 결정 되는대로 단행하시기를 희망합니다."

         명성황후 시해 석달 전, 야마가타 유군대장이 무쓰 외상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정말로 무서운 것을 찾아냈다. 일본인으로서는 짐작은 했지만 찾아내기는 힘든 것이다. 역사의 진실은 반드시 드러나게 돼 있다.”

일본 정부가 명성황후 시해에 직접 개입했음을 방증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육군대장과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 외상 사이의 편지를 보고 고야쓰 노부쿠니(子安宣邦·정치사상사) 일본 오사카(大阪)대 명예교수는 이런 반응을 보였다. 지난달 중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세계석학초청강좌에 초대된 고야쓰 교수는 최문형 한양대 명예교수가 일본 헌정자료실에서 찾아낸 이 편지의 해독에 큰 도움을 줬다. 한자학에도 조예가 깊은 그는 일본 메이지시대의 한문서체를 전공한 일본인 학자들을 동원해 그 뜻을 명확히 규명해 줬다.


▽‘1895년 7월 8일’의 의미=이 편지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편지가 쓰인 시점. 1895년 7월 8일은 일본 정부의 정책이 회유책에서 강경책으로 전환하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독점적 권한을 확보했다고 자신했던 일본은 1895년 4월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3국 간섭’으로 랴오둥(遼東) 반도를 되돌려 줬다. 이를 지켜본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일본을 배격하는 ‘인아거일(引俄拒日)’책으로 돌아서 5월 13일 친일파의 거두인 군부대신 조희연을 파면한 뒤 28일에는 친일 성향의 2차 김홍집 내각을 해체하고 친러파를 대거 기용했다.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주한 일본공사는 본국 정부와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6월 20일 귀국했다. 이처럼 일본에 불리한 상황은 7월 8일 직전에 반전한다. 7월 5일 아오키 슈조(靑木周藏) 주독일 일본공사가 ‘독일의 이탈로 3국 연합은 매장만 안 된 시체’라고 보고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신정변(1884년)의 실패로 일본에 망명했다가 이노우에의 압력으로 갑오개혁(1894년) 때 내무대신에 임명된 박영효가 7월 6일 역모사건으로 실각했다는 보고가 접수됐다. ‘내외(內外)에 대해 방관 좌시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라는 편지글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편지 속 인물들=이 편지에는 메이지시대의 3대 거물 정치인이 등장한다. 편지를 쓴 야마가타는 메이지 유신의 공신으로 일본 육군의 창설자이자 1889∼91년 총리를 지낸 거물로 일왕의 자문에 응해 막후에서 국사를 좌지우지한 겐로(元老)였다. 당시 일본 정치는 조슈번(지금의 야마구치·山口 현) 출신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총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그리고 편지 속 세외(世外) 백작으로 등장하는 이노우에가 겐로 역을 맡고 있었다. 특히 이노우에는 직함은 국장급인 공사였지만 이토와 영국 유학을 같이 다녀온 친구 사이로 1차 이토 내각의 외상, 2차 이토 내각에서 내상을 맡은 인물이었다.

형식상 이노우에의 상관이자 편지를 받은 무쓰 외상은 이노우에가 외상을 맡았을 때 전격 발탁한 인물이다. 무쓰는 그해 6월 5일부터 폐병으로 도쿄 인근 오이소(大磯)에서 요양 중이었다.

조선과 관련된 문제에 전권을 위임받았던 이노우에 가오루(왼쪽). 당초 명성황후에 대한 회유책을 제시했던 그는 일본 각의의 의견을 받아들여 명성황후 시해를 수행할 자신의 후임자로 육군 중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오른쪽)를 추천한 것으로 보인다.

▽편지의 재구성=일본의 역사소설가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는 ‘민비 암살-조선왕조 말기의 국모’라는 책의 결론에서 무쓰 외상이 동향 후배로 시해사건에 가담했던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가 보낸 편지를 읽고 비로소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알았다며 “아무리 자유로운 상상력의 날개를 펼쳐도 일본 정부와 이 사건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야마가타의 편지의 내용을 볼 때 무쓰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전에 모종의 강경책을 제시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야마가타가 편지에서 “경악을 금할 수 없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말과 함께 “각의에서 결정되는 대로 단행하시기를 희망한다”고 쓴 것은 무쓰의 강경책에 동의한 것이라는 게 최 교수의 해석이다.

이 문장에 우리말 존대어미 ‘시’에 해당하는 어(御)가 쓰였는데 최 교수는 이를 두고 “한국 문제에 전권을 지니고 있던 이노우에가 일을 단행하기를 바란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이노우에는 무쓰보다 여덟 살, 야마가타보다 두 살이 더 많다.

이노우에는 귀국 직후 조선 조정에 300만 엔의 기증금을 주는 방식으로 명성황후를 회유하자는 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는 일본 내각의 생각과는 거리가 있는 제안이었고 편지는 이노우에가 각의 결정을 받아들여 강경책으로 선회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담았다는 것이다.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잠들어 있다가 일본 군대의 호위를 받은 낭인들의 급습으로 참변을 당한 경복궁 내 옥호루. 동아일보 자료 사진

최 교수는 일본 각의가 사실상 명성황후 제거 결정을 내린 때를 바로 이 시점으로 보고 있다. 기증금안을 제시했던 이노우에가 문제의 편지가 쓰인 7월 8일 직후에 돌연 자신의 후임으로 동향의 육군 중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추천했기 때문이다. 한일 관계 최고 전문가로 ‘백의종군’에까지 나섰던 이노우에가 긴박한 시기에 외교의 문외한인 미우라를 후임으로 추천한 것은 손에 피를 묻히는 일에는 자신보다 ‘칼잡이’가 적격이란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최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자료를 보완해 곧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지식산업사)의 완결판을 출간할 예정이다. 2004년 일역판(사이류샤·彩流社)이 나왔던 이 책은 현재 영역 작업도 진행 중이다.


명성황후 시해, 日내각 개입 문건 찾아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일본 정부가 개입했음을 보여주는 편지. ①은 “보내 주신 가르침대로 내외(內外)에 대해 방관좌시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라는 내용. ②는 “묘의(廟議·각의)에서 결정(決定)되는 대로 단행(斷行)하시기를 희망(希望)한다”는 내용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1895년 10월 8일·을미사변)이 일본 내각의 지시에 따라 이뤄졌음을 보여 주는 물증이 발견됐다.

최문형(역사학) 한양대 명예교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1838∼1922) 육군 대장이 1895년 7월 8일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1844∼1897) 외상에게 보낸 편지를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서 찾아내 사본과 내용을 공개했다.

야마가타는 이 편지에서 “별첨한 글을 보고 실로 경악해 마지않았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확실한 것은 세외(世外) 백작을 즉각 도한(渡韓)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내 주신 가르침대로 내외(內外)에 대해 방관좌시(傍觀坐視)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각의에서 결정되는 대로 단행하시기를 희망합니다”고 밝혔다.

최 교수는 “한자와 일본어 필기체로 쓰인 이 편지에서는 행간에 담긴 의미가 중요하다”면서 “일본 내각의 핵심 인사들이 명성황후에 대한 회유 정책을 포기하고 그를 제거하는 강경책으로 전환하게 된 당시의 심정과 이 같은 분위기가 일본 각의의 결정에 반영됐음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편지는 총리를 지낸 거물로 당시 청일전쟁을 진두지휘해 승리로 이끈 뒤 일왕의 자문에 응하는 ‘겐로(元老)’였던 야마가타 대장이 폐병 요양차 지방에 머물면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내각의 인사들과 서신 왕래를 통해 대외정책을 조언하던 무쓰 외상과 명성황후 제거 필요성을 논의했음을 보여 준다.

편지에 등장한 세외 백작은 당시 주한 일본공사로 조선 문제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았던 거물 정치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1836∼1915)를 가리킨다. 청일전쟁 기간에 주한공사를 자원했던 이노우에는 명성황후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자 이에 대한 대책을 본국 정부와 협의하기 위해 귀국해 있었다. 이 편지가 쓰인 직후인 7월 10일경 이노우에는 자신의 후임으로 외교에 무지한 무인 출신의 미우라 고로(三浦梧樓·1846∼1926)를 추천했으며 9월 1일 미우라가 주한공사로 부임한 뒤 37일 만에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다.

최 교수는 “이 편지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의 개입을 부인하고 미우라-대원군 주모설을 주장해 오던 일본 측 주장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증거”라고 말했다.

한영우(국사학) 한림대 특임교수도 “일본 정부가 사건 관련 자료를 송두리째 파기한 점을 감안할 때 일본 정부의 개입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이만 한 자료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 동아일보 & donga.com, 2006.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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