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세 민영익(閔泳翊)/b> : 1860(철종 11)∼1914

 

            

- 구한말 민영익(閔泳翊·1860∼1914)이 1893년 조선보빙사 자격으로 구미 순방 때 사용한 명함.

- 우리나라 최초의 명함으로 추정.

- 미국산 종이에 요즘 명함 크기와 비슷한 가로 5.5㎝ 세로 9㎝인 이 명함에는 민영익 특유의 필체로 이름이 씌어 있다

  조선의 문신. 자는 우홍(遇鴻), 호는 운미(芸楣)·죽미(竹楣)·원정(園丁)·천심죽재(千尋竹齋).

   민태호(台鎬)의 아들로서 명성황후의 오빠인 민승호(閔鎬)에게 입양되었다.

  1877년(고종14) 庭試文科(정시문과)에 丙科(병과)로 급제, 吏曹 參議(이조참의)가 되었다.

  1881년 經理統理 機務衛門 軍務司 堂上(경리통리기무아문군무사당상)·軍務邊情譏沿司堂上(군무변정기연사당상), 이어 協辦統理衛甫事務(협판통리아무사무)가 되었다.

 

  1882년 壬午軍亂(임오군란) 때 민씨 척족의 거물로 지목되어 난군에게 집을 파괴당했고, 난이 수습된 후 謝罪使節(사죄사절)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權知協辦協通商事務(권지협판교섭통상사무)로 天津(천진)에 파견되어 海關事務(해관사무)를 교섭했다.

  1882년년, 23세 때 김옥균과 같이 부교사협판이 되었다.

  1883년 全權大臣(전권대신)으로 미국에 건너가 國書(국서)를 전달, 우리 나라 최초로 서양 문물을 시찰하고, 미 대통령 아서를 두 차례 만나 양국간의 우호와 교역에 관하여 논의를 하였다. 이어 미국의 여러 기관을 시찰하고 온 뒤에 우정국 설치, 전기설치, 육영공원 등을 조선에 실현하였다. 이후 惠商工局 總辦(혜상공국총판)이 되어 開化黨(개화당)을 탄압했다.

  1884년 이조 참판·禁衛 大將(금위대장)·協辨軍國事務(협판군국사무) 등을 지냈고, 10월에 개화당의 甲申政變(갑신정변) 때 부상, 미국인 醫師(의사) 알렌의 치료로 생명을 건졌다(최초의 서양식 병원 및 기독교 참고). 12월 親軍 右營使(친군우영사)가 되어 일본에 망명중인 金玉均(김옥균)·徐光範(서광범)등을 암살하기 위해 자객을 밀파했다.

  1885년 협판내무부사(協辨內務府事)로서 地理局(지리국)·軍務局(군무국)의 總辦(총판)을 겸직, 이어 漢城府 判尹(한성부판윤)·병조 판서를 지냈다. 이듬해 정부의 親露 拒淸 政策(친로거청정책)을 반대, 袁世凱(원세개)에게 이 사실을 密報(밀보) 했다가 자신의 정치적 거취가 곤란해지자 홍콩(春港)으로 망명했다. 후에 귀국, 統衛使(통위사)·鍊武公院 辦理事務(연무공원판리사무)를 거쳤다.

  1889년(광무 2) 찬정(贊政)이 되었고, 그후 고종 폐위 음모에 관련되어 다시 홍콩으로 망명했다가 돌아왔다.

  1905년 露日戰爭(노일전쟁) 후 친일정권이 수립되자 上海(상해)로 망명, 그 곳에서 죽었다.

  행서에 능하였고 중국문인화의 대가로 많은 묵죽(墨蘭)도와 석죽도가 전하고 있다. 민영익의 예술은 이러한 인생 역정 속에서 형성되었고, 격랑의 세월 한가운데서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펴나간 그의 기백과 좌절의 아픔을 필묵에 담아낸 것이다. 그는 글씨도 잘 썼지만 그림도 잘 그렸다. 당시 사람들은 대원군과 민영익의 난 그림을 쌍벽이라고 하였는데, 잎이 큰 민영익의 난초와 대원군의 춘란은 각각의 개성이 돋보인다(민영환과 이하응의 묵란도 참고).  

 

조선왕조 최연소 이조참의-19세의 민영익

 

  조선시대는 태종 때부터 6조직계제가 시행되고, 그 중 이조는 서열이 우두머리로 병조를 제외한 모든 문무관리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영의정도 이조전랑의 눈치를 보았을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조전랑에는 장5품의 이조정랑(2인)과 정6품의 이조좌랑(2인)이 있었다. 한번 전랑이 되면 재임 중 역모나 사화 등 특별한 사고가 없는 한 판서나 정승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출세가 보장된 자리였다. 즉 명분과 실리를 함께 챙길 수 있는 특수한 자리였으므로 관료치고 누구나 탐내는 그런 자리였다. 조금 특이한 것은 조선시대 품계상 정3품 이상을 당상관(통정대부)이라 하여 고위관직의 기준으로 삼고 옷도 자색을 입었다. 그런데 이조전랑은 정5품과 6품으로 당상관에도 끼지 못하는 당하관과 참하관에 지나지 않은 낮은 품계였다. 현재의 직급으로 보면 내무부나 총무부의 인사담당 과장급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이조정랑은 이임하는 전임자가 후임 이조 정랑의 추천권을 주어 대신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하였는데 이를 '전랑자천제'라고 하였다.

  바로 이러한 인사권의 중심인 이조참의에 19세의 민영익이 임명되었다. 1877년(고종14) 18세에 과거에 급제해 이듬해인 1878년 19세의 나이로 이조참의가 되어 인사권을 장악한 민씨 척족 세력인 민영익, 그는 조선왕조 역사상 최연소 '이조참의'였다. 고모인 명성황후 민비의 후광이었겠지만 아무튼 남들은 10년 이상 걸리는 자리를 단숨에 꿰차고 20세도 못되어 실제의 자리에 앉았던 주인공이었다.

http://www.gunsarang.net/cyber_moon/chosun/Chosun_Content_2_122.html

 

민영익과 김옥균

 

  1884년 12월 4일은 오늘날 우체국의 전신인 우정국이 개국한 날, 우정국의 연회장에서는 개국 축하연으로 밤 늦게까지 떠들썩하였다. 그러나 이날의 축하연은 난데없는 화재로 말미암아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고,  명성황후 민비의 유일한 친정 조카인 민영익이 피습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날 밤에 있었던 이 사건을 이름하여 갑신정변이라 부른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그리고 그 사건의 첫 희생자인 민영익, 이들은 한 때 잠자는 조선을 일깨우고 이 나라에 그대화의 횃불을 밝혀 보고자 했던 이른바 개화파 동지들이었다. 고종 부처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인물 민영익, 그는 이미 19세 때 조정의 인사권을 한 손에 장악하는 이조참의 자리에 오르는 등 세도 재상가의 위치를 굳히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이른바 8학사로 불리던 젊은 재사들이 모여 서화를 연마하고 시사를 논했다. 그러한 두 사람이 어째서 이날밤 이 자리에서 한 사람은 조선 독립이라는 이름을 내건 정변의 주체자로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제거돼야 할 인물의 하나로 마주서게 되었을까?  당시 청나라 세력을 배경으로 하는 민씨(閔氏) 일파의 세도정치가 지나치게 수구적(守舊的)인 데 불만을 품고 국제정세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개혁을 단행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수구파의 제거가 불가피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나자 일본으로 망명, 10년간 일본 각지를 방랑한 후 94년(고종 31)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가 자객 홍종우(洪鍾宇)에게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