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20년의 일이다. 한.미 조약에의하여 그 해 4월 7일에 처음으로 미국 전권공사 푸드가 우리나라에 와서 서양 사신으로는 처음으로 국왕을 알현한후 서울에 상주하게 되었고, 정부에서는 그 답례로 그 해 6월에 민영익을 전권대사로 임명하고 그 부관으로 홍영식, 서광범, 변수 등을 수행원으로한 11명을 미국에 파견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 형편이 따로 배편을 마련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푸드 공사가 타고 온 미국 군함편으로 워싱톤을 향해 출발하였다. 사절단 일행은 샌프란시스코 까지는 배편으로 가서 그곳에서부터 워싱톤 까지는 기차편을 이용하였다. 그런데 기차편으로 워싱톤으로 향해가는 그 여정에서 우연히 동승한 미국 감리교회의 목사 가우처 박사를 만났다. 이 분은 교육자 이며 또 해외 선교에 지극히 관심이 많은 분이었다. 가우처박사는 처음에는 민영익 일행의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색다른 복장에 관심을 갖고 통역을 통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한국의 상황과 선교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워싱톤에 도착한 후 사절단일행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많은 대화를 함으로써 한국의 사정과 선교 가능성을 재확인 하였다. 그는 뉴욕에있는 선교부에 많은 선교 자금을 보내면서 한국 선교를 촉구하여 미국감리교회 총회 선교위원회로 하여금 한국 선교를 결의토록 하였다.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은 자객들의 칼에 맞아 일곱군데에 상처를 입는 중상을 입었다.한국의 의사들이 총동원됐으나 빈사상태에 빠진 민영익을 회복시키지 못했다.알렌은 민영익을 치료하여 그의 건강을 회복할 수 있게 하였는데 이 일로 인해 알렌은 왕의 신망을 얻게 되었고 왕의 시의(侍醫)가 되었다. 민대감은 감사헌금으로 알렌에게 10만냥을 주었다.이것으로 광혜원이 건립됐다.이 사건은 서양선교사들에 대한 반감을 누그러뜨리고 서양의 의술과 학문을 수용하는 전기가 됐다.그러니까 민영익을 중심으로 한 미국 사절단 일행은 가우처 박사를 만남으로써 한국의 기독교 전파의 계기가된 것이다.

  한국에 와서 상주하며 선교한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는 알렌(Horace Newton Allen)이었다. 알렌는 처음, 미국 장로교 선교부 소속의 의료 선교사로서 중국에 파송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사역은 그다지 큰 열매를 거두지 못하였다. 선교사역 실패로 낙담하던 그는 친구들의 격려에 힘입어 다시한번 선교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조선으로의 진출을 모색한 것이다. 드디어 미국 선교본부의 승인을 얻어 1884년 9월 20일 제물포항을 통하여 한국에 입국하게 된 것이다. 입국 후 알렌은 미국공사관과 다른 외교기관의 의사로 임명되어 일을 하기 시작했다.

 

  1884년 갑신정변 때의 일이다. 사대주의의 수구파와 혁신세력의 개화당이 대립하더니, 청나라가 안남문제로 프랑스와의 싸움에서 대패하자 그 소식을 들은 독립당은 청나라가 전쟁에 패하여 조선을 돌볼 여유가 없을 것으로 믿고, 일본공사 다께조에와 밀의하여 일본 주둔군의 힘을 빌려 정변을 일으켜 혁신정부를 세울 계획을하고 있었다. 마침 새로운 관제에 의하여 신설된 우정국이 개국되어 축하연회가 열리게 되었는데, 여기에 내외 고관이 초청됨을 이용하여 혁신세력들이 이웃집에 불을 질러 그로 인하여 연회장이 혼란하게 됨을 기회로 미리 매복한 군졸들로 하여금 민영익을 중심으로 한 사대당의 요인들을 암살하려 했다 (민영익과 김옥균 참고).  

그러나 민영익은 중상만 입었을 뿐이며 혁신세력들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이 때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선교 의사인 알렌이 치료해주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알렌은 후에 고종의 주치의가 되었다. 민영익이 미국 전권대사로 갔을 때 우연히 기차에서 목사 가우처 박사를 만남으로 인하여 미국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한국을 찾는 계기가 되었고 또 민영익은 미국 선교의사인 알렌의도움으로 목숨을 구하였으니 하나님의 섭리가 이러하다.

알렌을 비롯한 선교사들은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고 그 부인들과 아이들은 자주 명성황후의 부름을 받아 입궐하기도 하였고 그 앞에서 스케이트를 타기도 하고 다과를 나누며 서양문물과 기독교복음을 전하는 일이 많아졌다.  

한편 당시 외국과 외국인에 대한 반감은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맞물려 선교의 일에 큰 장애요소였다. 그런데 이제 이 일로 인해 공개적인 선교의 기회가 오게 된 것이었다. 알렌은 이듬해에는 광혜원이라는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국립병원을 개원할 수 있었고 이 병원은 초기 한국 선교사들의 선교사업에 큰 역할을 담당하는 중요한 선교기지가 되었다.  

  복음을 전하는 방법에는 직접선교와 간접선교가 있다. 직접선교는 말 그대로 직접 거리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간접선교란 병원이나 학교 등을 세워 그것을 통해 기독교 정신을 보여줌으로써 복음을 수용하는 데에 거리감이 없도록 만든다. 또알렌을 비롯한 선교사들은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고 그 부인들과 아이들은 자주 명성황후의 부름을 받아 입궐하기도 하였고 그 앞에서 스케이트를 타기도 하고 다과를 나누며 서양문물과 기독교복음을 전하는 일이 많아졌다.  

  한편 당시 외국과 외국인에 대한 반감은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맞물려 선교의 일에 큰 장애요소였다. 그런데 이제 이 일로 인해 공개적인 선교의 기회가 오게 된 것이었다. 알렌은 이듬해에는 광혜원이라는 최초의 근대식 국립병원을 개원할 수 있었고 이 병원은 초기 한국 선교사들의 선교사업에 큰 역할을 담당하는 중요한 선교기지가 되었다.

 

  복음을 전하는 방법에는 직접선교와 간접선교가 있다. 직접선교는 말 그대로 직접 거리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간접선교란 병원이나 학교 등을 세워 그것을 통해 기독교 정신을 보여줌으로써 복음을 수용하는 데에 거리감이 없도록 만든다. 또한 신문이나 잡지, 단체 등을 조직하여 선교하는 일도 간접선교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직접선교 만을 고집하고 그것만이 합당하다고 여긴다. 간접선교를 무시하고 나아가 그것을 마치 선교와는 동떨어진 세상적인 일로 치부하는 잘못된 생각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선교의 일에 있어서 간접선교는 오히려 직접 선교보다 더욱 큰 힘을 발휘할 때가 있다. 직접선교를 막는 장벽을 허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간접선교이다.  

  구한말의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 직접선교는 오히려 복음증거의 길을 영구히 막아버릴 수도 있었다. 사람들의 외국에 대한 일반적 생각과 외국인들에 대한 오해로 인해 직접선교는 오히려 복음의 확산을 막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외국인들이 아이들을 잡아다가 눈을 빼어 약을 만든다는 둥, 선교사들을 앞잡이로 보내어 조선을 침탈하려 한다는 등의 어처구니 없는 소문들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때에 민영익이라는 정부의 거물을 치료함으로써 얻은 효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하고 큰 것이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말에 있지 않고 행함과 진실함에 있다. 복음이 전하여지는 통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지만 그것을 전하는 좋은 방법은 사람의 지혜를 요구한다.

 

2001. 6. 29 기독교대한 성결교회 주님의교회 목사 박찬희

소설 아리랑 배경

 

민영익과 이하응의
 묵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