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남연군(이구)
남연군 묘의 이장과 가야사
풍수지리에 대하여
도굴 사건
남연군 묘의 지세
위치
찾아가는 길
이조오백년 종말의 혈 남연군묘
영탑사 범종


남연군(南延君; ?-1822)

    숙종 이후의 가계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영조는 맏아들인 장헌세자(莊獻世子, 혹은 장조,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였지만, 장헌세자와 혜경궁홍씨와의 사이에 난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이 되니 이가 곧 정조이다. 또한 장헌세자는 숙빈임씨와의 사이에 아들 셋을 두었는데, 정조와는 이복형제들이다. 큰 아들 이진(은신군; 恩信君)은 아들이 없어서 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의 6대손 이병원(秉源)의 아들 이구(球)를 입양하여 남연군에 봉해졌다. 남연군의 부인은 민경혁의 딸인 여흥민씨이며, 아들 넷을 두었는데, 막내 아들이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이다.

    남연군은 양부인 은신군이 1771년(영조 47) 김구주(金龜柱) 등의 모함으로 삭작되어 제주도에 위리안치된 뒤 변사하자 블우한 환경에서 살았으나, 1815년에 수원관(守園官), 1821년에 수릉관(守陵官) 등 말단직을 역임하였다. 순조 22년인 1822년에 죽어 경기도 연천에 안장되었으나, 흥성 대원군이 명당자리를 찾아 충청도 덕산(德山)으로 이장었다. 이곳이 흥선대원군이 왕이 되기를 꿈꾸는 야심을 묻은 곳으로 남연군의 묘로 유명한 곳이다. 흥선대원군의 조부 대는는 정조와는 이복형제이지만 권력의 갈등에서 자의건 타의건 역모라는 모함에 걸려서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가서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철종 참고).  

   정조와 수빈박씨와의 사이에 난 아들이 순조 임금으로서 11살의 나이에 등극하여 섭정을 받으니 정조 이후의 왕권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고, 외척 안동김씨의 세상이 되었다. 게다가 왕들이 단명하고, 헌종은 청년으로 세자(世子)가 없었고, 세제(世弟)도 없었다. 안동김씨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허수아비 왕으로 강화도에서 농사 일을 하던 숙빈임씨의 3째 아들인 이찬(은전군)의 손자를 임금으로 모시니 곧 철종이다.

    왕권이 강할땐 신권(臣權)이 약하고 신하들의 권력이 막강하면 왕실은 나약하기 그지 없었다. 조선 후기 왕실은 미약한 존재였다. 권력이 안동 김씨, 즉, 장동 김씨(당시 세도정치를 이끌었던 안동 김씨가문이 서울 자하동에 살았음)의 세족에 의해 60여년 가까이 장악되고 있었다. 사도 세자 이래로 정조대왕과는 이복 형제사이로서 손자대인 흥선대원군과 임금과는 칠촌 숙질 사이로 벌어졌지만 흥성대원군은 왕으로 오를 수 있는 몇 안되는 왕손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세도정치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에 흥선군 이하응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생각이 깊어 비범하였으므로, 종친이 똑똑하면 곧 죽임을 당하던 터라 흥선군은 일부러 부랑자 생활을 하며 청년 시절을 보냈다. 유림들의 가랑이 밑을 기는 치욕을 당하면서도 절치부심하며 복수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연군 묘의 이장과 가야사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세도에 불만을 품고 정권을 다시 찾아 왕권을 회복하겠다는 야심으로 명당자리를 찾아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려고 풍수지리 책을 모두 읽었다고 한다. 아버지 남연군의 산소를 이장할만한 명당자리를 찾아 10여 년 동안 헤메다 다음에 설명하는 바와 같이 지관이 안내해 준 가야산에 명당을 구했다. 남연군의 묘를 가야산 그 자리에 쓰게 된 것에 대해 황현(黃玹:1855∼1910; 호는 매천; 梅泉)이 지은『매천야록』에서, 예산의 황토사가 박흥식씨는「가야사와 흥선대원군」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다.

 

  흥선군 이하응(1820∼1898)은 자신의 야망은 안동 김씨에게 들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한량들과 어울린 것은 고등의 위장술로 잘 알려져 있지만 야심 또한 대단하였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충청도 내포지방에는 명당 중에서도 최상의 땅인 자미단국이 있다 하여 이를 찾기 위해 순례하는 풍수사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자미단국이란 산봉우리가 겹겹이 둘러싸고 있어 마치 큰 집의 울타리와 같이 생긴 형국으로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이러한 땅은 흔히 도읍지나 왕도처로 적합한 곳인데 내포땅에 맺힌 단국은 음택지로서 왕후재상이 나올 터라는 것이었다.

 

  대권의 야망을 품고 절치부심하며 살았던 대원군이 이 소문을 새겨듣지 않을 리 없었다. 수 차례에 걸쳐 내포 땅을 답사하였으며 끝내 자미단국을 찾지는 못하였으다. 그러한 때에 정만인이라는 지관이 찾아와 말하기를 충청도 덕산땅에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리는 자리(萬代榮華之地)"가 있고 또 가야산 동쪽 덕산에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자리(二代天子之地)"가 있으니 둘 중에 한 곳에 선친의 묘를 쓰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흥선군은 후자를 선택하였다. 안동 김씨의 세도에 눌려 주정뱅이로 세월을 보냈던 이하응, 그의 나이 26세의 일이었으니, 혈기방자한 흥선군의 야심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정작 지관이 가리키는 가야산 자리에는 이미 가야사라는 절이 들어서 있었다. 게다가 명당이라는 바로 그 자리에는 금탑(석탑인데 상륜부가 반짝거려 이러한 별명이 붙은 탑)이 우뚝 서 있는 절집의 안마당이었다. 당시만 해도 가야산 골짜기에서 가장 번창했다는 가야사가 건재했던 때로서, 이 자리에 야심을 심기 위해 흥선군은 차례차례 일을 벌여 나갔다.

 

   그는 우선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의 묘를 임시로 탑 뒤 산기슭으로 옮겼다. 그 땅은 영조때 판서를 지낸 윤봉구의 사패지로 그 후손에게서 자리를 빌렸다. 연천에서 가야산까지 오백리 길을 종실의 무덤을 옮기는 일이었으므로 상여는 한 지방을 지날 때 마다 지방민들이 동원되었는 데, 맨 마지막에 운구를 한 '나분들(남은들)' 사람들에게 상여를 기증하였다. 이 상여는 지금도 남은들 마을에 보존되어 있으며(중요민속자료 제31호), 그 이름을 따서 '남은들 상여'라 한다. 6 미터에 이르는 긴 상여이다. 그리고 임시묘가 있던 곳은 '구광지(舊壙地)'라고 하여 지금도 움푹 패여 있다.

 

  두 번째 일은 가야사 절을 폐하는 일이었다. 다음 해 흥선군은 성묘를 빙자하여 내려와서는 마곡사의 스님 셋을 불러 '나라의 종실을 위하여 가야사를 소각하여야만 하겠으니 이 절에 불을 지르라'고 하였다. 그들은 '불제자의 몸이 어찌 우리 손으로 법당을 불사를 수 있겠는가'고 항거 하였지만 주위의 위압에 어쩔 수 없이 불을 지르고 말았다. 또한, 『매천야록』에서는 흥선군이 재산을 처분한 2만냥의 반을 주지에게 주어 불을 지르게 했다고 하고, 박흥식씨는 흥선군이 가보로 내려오던 단계 벼루를 충청감사에게 뇌물로 주고 중들을 쫓아낸 다음 불을 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불을 지른 중들은 가야사에서 수덕사로 가는 길이 사동리 뒷고개를 넘지 못한 곳에서 한 중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죽었다고 이야기를 덧붙인다. 진실이야 어찌됐던 흥선군의 계획은 차분히 진행되었다.

   가야사에 관한 기록은 전하는 바가 없는데 마을사람들의 구전에 따르면 대웅전에 세 분의 철불이 모셔져 있었고, 불길에 휩싸인 철불이 모두 녹아내려 쇳덩이가 되었다고 하니 철불이 유행했던 하대 신라나 고려 초기에 융성했던 사찰임을 추정할 수 있다. 또 남연군 묘 아래쪽 개울에 서북방을 바라보는 석불이 세워져 있는데 이 불상도 원나라의 영향으로 세워졌던 고려시대 양식이다. 이 불상은 필시 가야사의 법당지에 있었을 터인데 무덤을 쓰면서 서북방의 좋지 못한 기를 막아내기 위해 옮겨 세운 듯 하다. 전설에 따르면 대원군이 가야사를 불태울 때 울면서 등을 돌렸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해가 돋았을 때 천년고찰 가야사는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로 변해 있었고, 절 뒤 금탑만 홀로 남아 있어 아침햇살을 받아 여전히 찬란하였다.' 가야사가 불에 타 재가 된 다음 해인 헌종 12년(1846) 3월 흥선군은 세 형과 함께 선친묘소를 찾아 마을 민가에 머물렀다. 대망을 이루기 위해서다. [매천야록] 에 의하면 그날밤 흰옷을 입은 금탑의 신이 4형제의 꿈에 나타나 노하여 꾸짖기를 '나는 탑신이다. 너희들은 어찌 내가 살고 있는 곳을 뺏으려 하는가. 만약 끝내 내가 살고 있는 곳에 묘를 이장하면 너희들은 폭사할 것이다.' 하였다. 아침에 일어나 서로의 꿈이 같음을 알고, 두 형은 두려워 했지만 흥선군은 태연히 '그렇다면 진실로 좋은 명당임에 틀림없다. 운명이란 하늘에 달린 것, 어찌 탑신이 우리에게 화를 미칠수 있겠는가?' 하고 형들을 설득했다. 도끼로 금탑을 내리쳐도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아 낭패였는데, 그때 흥선군이 "나라고 왕의 아비가 되지 말란 말이냐"하고 하늘에 소리친 뒤 도끼로 내리치자 도끼가 튀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매장을 마치고 난 후 흥선군은 나중에 누가 손댈까 걱정되어 철 수만 근을 녹여 부었고, 그 위에 강회를 비벼 다져서 봉분했다고 한다. 뒤에 언급될 오페르트 일당이 밤새 도굴하다 실패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탑을 부수고 절을 폐한 것이 마음에 걸린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즉위한 몇 달 뒤에 가야골 아래 상가리에다 한양에서 목수를 보내어 은덕을 보답한다고 지은 절이 보덕사이다. 남연군 묘에서 보아 왼쪽 산기슭에 풍채가 자그마한 민불이 있는데, 가야사가 탈 때 그 모습이 보기 싫어 돌아섰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이상하게도 골짜기 앞쪽이 아니라 골짜기를 향해 있다. 다른 얘기로는 남연군 묘의 풍수에서 보면 그쪽이 좀 비어 보이므로 빠져나가는 기를 돌부처로 막느라고 부처를 세웠다고도 한다.

 

풍수지리

 

  사람은 만물의 영장답게 세계를 지배하며 살아가지만 유구한 자연현상에 비하면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 태어나 대지를 갈아엎으며 살다가도 목숨을 다하면 한줌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땅에 대한 생각을 종교처럼 신성하게 간직하였다. 땅을 살아있는 생명체로 바라보았으며, 땅 속에 흐르는 기를 받아들여 조화로운 삶을 살고자 했다. 천지의 기를 받아들여 심신을 수련하는 양생술(養生術)과 선도를 발달시켰으며, 기가 많이 모이는 곳에 주거를 이루고 살며, 발복(운이 틔어 복이 닥치는 것)을 이루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죽은 후 유골일지라도 좋은 기가 흐르는 땅에 묻히면 그 유해가 받는 기가 후손에게 전달된다는 동기감응(同氣感應)의 철학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를 가리켜 흔히 풍수(風水)라 이름한다.

 

  풍수사상은 우리민족이 자연과 더불어 삶을 영위하던 모든 생각과 가치들이 투영되어 있으며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이 되기도 했다. 어느 땅을 찾아가든 풍수지리와 연관된 흥미진진한 역사가 숨쉬고 있다.

  어떤 집은 묘자리를 잘못 써서 패가망신하였고, 또 어떤 이는 명당바람이 불어 출세하였으며, 우리동네 형국은 옥녀가 베를 짜고 있는 형국이라느니, 목마른 말이 목을 축이는 형국이라니 등등.

 

 

도굴 사건

    1866년 3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조선과의 통상교섭에 실패한 오페르트(Oppert. E.J)는 기회를 노리다가 병인사옥 때 탈출하여 프랑스 제독 로즈의 조선원정 당시 향도 및 수로안내인이었던 프랑스 신부 페롱과 조선인 천주교도의 의견에 따라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발굴해 시체와 부장품을 이용하여 대원군과 통상문제를 흥정하려는 의도에서 도굴 사건을 계획하였다.

   독일인 오페르트 는 자금을 전담하였던 미국인 젠킨스(Jekins,F.), 페롱, 묄러(Moeller)선장, 조선인 모리배 2명, 백인 8명, 조선인 천주고 약간명, 말레지아인 20명 등 유럽·필리핀·중국선원 총 140명으로 도굴단을 구성하였다. 그들은 1868년(고종 5년) 5월 680톤의 기선 차이나호와 60톤의 증기선 그레타호 등 1천톤급의 기선 두 척을 이끌고 일본 나가사키에서 머스킷 소총과 도굴용 도구를 구입한 다음, 동월 10일 충남 덕산군 구만포에 상륙, 아랍상인이라 사칭하면서 남연군묘로 행군하였다. 도굴단은 덕산군청을 습격, 군기를 탈취하고, 민가로부터 발굴도구를 약탈하여 가동(伽洞)의 남연군 묘로 직행, 밤에 도굴에 착수하였다. 묘지기 몇 명이 당해낼 재간이 없는 급습이었지만 묘광이 견고하고, 날이 밝아 동민들이 모여들며, 서해 바닷물이 빠지는 시각이 다가오자 이들이 황급히 퇴각하였다.

   오페르트는 퇴로에 인천 영종도에 들러서 프랑스 제독 알리망(Allemagne)의 명의로 "귀국의 안위는 존하의 처단에 달렸으니 대관을 파견, 교섭하자."라는 내용의 글을 흥선대원군에게 전해달라고 하였으나, 영종첨사 신효철(申孝哲)은 도굴행위의 만행을 규탄하고 양이(洋夷)와는 성기(聲氣)가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글을 되돌려주었다.

   이 사건은 중국 상해의 외국인들 사이에서도 적지 않은 물의를 일으켰으며, 젠킨스는 미국인에 의해 불법파렴치죄로 기소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무죄가 되었다. 페롱은 프랑스정부에 의해 소환당했다. 우리나라는 조상숭배사상이 강하여 묘를 신성시하였는데, 더욱이 국왕의 할아버지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자 흥선대원군이 크게 노하였다.

 

  오페르트 도굴사건은 흥선대원군을 자극해 협상테이블로 이끌어 내려고 하였던 이들의 당초 목적과는 반대로 대외적으로는 서양인의 위신을 크게 떨어졌으며, 대내적으로는 흥선대원군의 서양인에 대한 감정을 악화시켜, 쇄국정책을 한층 강화시키고, 천주교 탄압이 가중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의 도굴 목적은 뒷날 젠킨스가 법정에서 진술한 바에 의하면

   1. 조선왕국과 통상조약의 체결을 교섭하는것

   2. 조선의 사신 1명을 배에 태워 세계일주 여행을 시키자는 것

   3. 이와같이 하여 은둔국인 조선을 세계에 소개하자는 것이었다고 한다.

 

 

남연군 묘의 지세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윗가야골에는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의 자세는 풍수지리가 일컫는 명당의 조건을 모두 갖춘 곳이다. 뒤로 가야산 서편 봉우리에 두 바위가 문기둥처럼 서 있다는 석문봉이 주산이 되고, 왼쪽으로는 옥양봉, 만경봉이 덕산을 거치면서 30리에 걸쳐 용머리에서 멎는 청룡세를 이루고, 오른쪽으로 백호의 세는 가사봉, 가엽봉에 원효봉으로 이어지는 맥이 금청산 월봉에 뭉쳐 감싼 자리이다. 동남향을 바라보면 평야를 지나 멀리 60리 떨어진 곳에 있는 봉수산이 안산이 된다. 남연군 묘 앞에 있는 장명등 창으로 남쪽을 바라보면 그 동그란 창 새로 보이는 곳이다. 또 청룡맥의 옥녀폭포의 물과, 백호맥의 가사봉계곡의 물이 와룡담에 모였다가 절앞에서 굽이치며 흐르니 임수의 지세도 얻었다 할 수 있다. 가야사는 그 두 물줄기가 합치는 곳이었다. 금탑이 있던 자리라는 남연군 묘는 그 뒤 우뚝 솟은 언덕빼기이니, 흔히 절 마당이나 법당앞에 탑을 놓는 방식과는 달리 절 뒤쪽의 언덕에 탑이 있었던 것만이라도 예사자리는 아니다.

 

1845년 3월 18일 흥선군은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고, 7년후 1852년(철종 3)에 둘째 아들 재황(아명 명복)을 얻었고, 그로부터 11년 뒤인 1863년 철종의 뒤를 이어 조선 21대 고종으로 왕에 올랐다.  고종의 아들이 순종이 되었으니 2대 천자를 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바록 조선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한 비운의 황제였을망정 황제는 황제였다.

  대원군은 가야산과 가야사의 음덕에 보답하는 의미였는지 아니면 자신의 욕심이 지나쳤음을 뉘우치는 의미였는지 모르지만, 고종이 등극한 2년째 되던 해에 남연군의 묘 맞은편 산기슭에 있는 서원산 기슭에 절을 짓고 '보덕사(報德寺)'라는 이름을 내렸고, 남연군 묘 앞에 보이는 땅은 절에 귀속하게 하였다. 보덕사 경내에는 부서진 것이기는 하지만 석 등의 화사석이 하나 전해지는데, 이 화사석의 사면에 새겨진 사천왕의 조각을 보면 제법 정교한 것이 하대신라풍이어서 가야사에서 옮겨온 것이리라고 추측되어 진다.

   이 절은 토목금벽으로 치장하여 대단히 화려하였으며, 많은 전토와 보화가 내려졌다고 전하는데 6.25때 소실되었고, 근래에 중창되어 수덕사의 여승들이 정진하는 도량이 되어 있다. 가야사 터가 광활한 느낌의 도량이었다면 보덕사는 이와 대조적으로 산중턱에 감춰진 듯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위치  

 

  온양에서 삽교로 가는 중간에 덕산면 상가리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덕산온천을 비롯하여 수덕사, 윤봉길의사의 사당과 옛집터가 남아있어 명승지로 각광받고 있다.

  - 소재지: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 사적: 지방문화재 자료 제 187호

  - 남연군묘는 기념물 제80호

 - 남연군 비는 문화재자료 제191호

  

 

찾아가는 길

 

 

 

장항선 열차를 타고 삽교역에서 내리면 가장 빠르다. 버스를 이용할 경우 남부터미널에서 예산행 버스를 이용, 예산에서 덕산가는 버스로 갈아탄다.

 

  남연군 묘와 보덕사를 가려면 덕산에서 상가리까지 군내버스나 택시를 이용한다. 돌미륵은 덕산온천 앞 버스정류장과 덕산 천주교 뒤 민가에 있고 삽교보살상은 덕산에서 홍성쪽으로 2km쯤 가는 지점 신리마을 입구 오른쪽 산등성이에 서있다.

  수덕여관은 덕산에서 택시나 수덕사행 버스를 타고 간다. 수덕사 일주문으로 오르기 전 왼편에 자리잡고 있다. 수덕사는 백제시대의 고찰로 우리나라 불교의 4대 문중인 덕숭총림이 있는 곳이다. 구한말의 거승 만공선사가 머물렀고 단순 간결하면서도 엄정한 분위기의 대웅전이 일품이다. 수덕사에서 덕숭산 오솔길을 타고 올라가면 정상 못 미친 곳에 정혜사가 있다.이곳에서 예산, 홍성 일대를 내려다 보는 전망이 시원스럽다.

   예산군 덕산읍 소재지에서 옥계저수지 쪽으로 난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약 4.5km 들어가면 상가리 남전 마을이 나온다. 남연군 묘는 이 마을 마을회관에서 북서쪽으로 500여 m 정도 들어가 석문봉과 옥양봉의 사이에서 내려온 능선의 남동향 사면 구릉 상단부에 위치한다.

 

대중교통

  예산버스터미널에서 덕산행 시내버스 이용(20분 간격/30분 소요)

도로안내

  예산읍->45번 국도(덕산방면)->덕산(15km)->남연군 묘(4km)

 

출처

  http://www.dnai.co.kr/sung/page2/cont_fun_07_3.htm

  http://chss.pknu.ac.kr/%7Ehistory/dabsa/2001-fall/51.htm

  http://www.newcyberspace.com/lch/html/lch008.htm

  http://www.hyeonmun.co.kr/htmls/2001/2-1.htm

  http://www.dcglobal.co.kr/info/info-tour2-7.html

  http://bgs.hs.kr/dapsa/choongnam/namyungoon.htm  

 

조선 오백년 종말의 혈 남연군묘 : 조문식

 

  흥선대원군 선고 남연군지묘를 천하대지요. 2대 천자지지라 하여 좋은 명당으로 간평하였기에 나도 한번쯤 가보고 싶었는데 오늘에야 보게 되었으니 기대가 된다. 용수배합이 되었는지 수구를 찾아 측정하여 보니 을진수구인 것 같다. 墓前 상석에 라침을 놓고 좌향을 보니 乾坐巽向이다. 을진 수구에 巽向이면 借庫消水自生向으로 향법에는 합당하다.

 

내용과 국세를 살펴보니 국세는 운장하게 개장하여 좌우로 뻗어 내려 용호사를 만들었으니 언 듯 보기에는 장관을 이루고 있으나 나에게 도움줄 사는 하나도 없구나. 현무를 돌아보니 과연 2대 제왕을 배출할 만한 천을 태을 이 신방과 해방에서 조영하고 庚兌方의 廉貞火星은 보기에도 위용있어 보이는데 이곳에서 출맥한 용 하나가 起伏하며 지현으로 래맥하니 언 듯 보기에는 아주 활발하여 호용같으나 자세히 관찰하면 이 용 자체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용이다. 이 용은 모산에 달라붙어 있으며 혼자서 독립하지 못하고 마치 엄마 품에서 어리광을 피우고 있는 어린아이와 같은 모양이다. 이러한 형상으로 내려오다 겨우 入首過峽處에서 박환하고 혈장에 입수한 맥은 겨우 100여미터 남짓하며 束氣와 起頭하지 못하였으니 과연 이 혈이 힘을 발할 수 있겠는가? 入首來龍이 이러하니 제왕이 무슨 힘을 발휘하였겠는가 생각된다.

 

  다음에 외세로 눈을 돌려 보면 화려하기가 그지없어 보인다. 문외한으로 좋게 평가하면 나무랄 곳 없는 아주 좋은 국세라 할 것이다. 풍수에서 흔히 논하는 뒤에는 완벽하리만치 장막을 치고 좌우에 용호는 장엄하게 뻗어내려 성곽을 이루니 뭇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현혹할 만한 자리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은 풍수의 참 의미를 논할줄 모르는 범인들이 하는 말이고 풍수학을 연구한 자는 좀 더 세밀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 혈에서 보면 국세는 너무 지나치게 크기 때문에 오히려 나에게 위압감과 해만 줄 뿐이지 득되는 곳은 한 곳도 없다.

 

   청오경에 山來水回하면 逼貴豊財요, 山囚水流는 虜王滅侯라 하였는데 이 산을 보고 말한 것 같다. 마치 어항에 갇혀 있는 금붕어와 같은 꼴이다. 그러면 왜 그렇게 되는지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한다. 이것은 내성이 없이 외성만 지나치게 높아 나를 압박하고 있으며 내사가 없으니 나를 도와주고 보호해 줄 사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천을 태을성으로 인하여 두 제왕은 배출하였으나, 힘없는 임금이 되고만 것을 이곳에 와서 새삼 느끼면서 땅의 위력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하니 풍수학을 연구하고 배우는 우리는 이러한 오류를 절대 범하지 말고 지나친 욕심에 사로잡히지 말아야할 것이다.

 

  한 사람의 욕망을 충족하려다가 결국에 국가의 패망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말이다. 만약에 이 자리가 호종사만 대동하고 내려와 내사의 보호만 받았더라도 그렇게 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호종사 하나 없이 혈혈단신으로 래용한 것이 가장 큰 欠缺이라 할 수 있고 다음은 좌우사가 나를 보호해줄 의향은 전혀 없고 좌우에서 나를 충사하고 들어오니 힘없는 혈이 감당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이 혈이 제왕 구실을 제대로 하려면 출맥하여 오면서 최소한 한두 번은 개장하여 호종사를 대동하고 독립하여 진출했어야 진결이 되는데, 보호사 없이 부모의 품을 벗어나지 못하고 출맥하여 결혈하였으니 외압만 있을 뿐이지 나르 보호하고 도와줄 것은 없지 않은가. 그러니 안타깝게도 왜놈의 세력에 제압되어 한일합방이 되고만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호라. 풍수를 공부하고 연구한 분들이여, 신중에 신중을 기할 일이로다.

 

  형세의 위력이 이렇게 대단하니 우리 후학들은 이러한 명당을 본보기로 삼고 만약 앞으로 점혈하게 되면 형세와 혈장과 지기를 모두 감지하고 세밀히 관찰하여 이러한 오류는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 사람의 욕심과 하나의 혈로 인하여 국운이 몰락하고 말았으니 이보다 더 큰 재앙이 어디 있단 말인가! 만약 평민이 이런 혈에 안장하였다면 동기간에 싸움은 끝일 날이 없을 것이고 또한 옥중생활이 반복되다 결국은 패가 절사하고 말 것이니 현명한 지사라면 어찌 함부로 점혈할 수 있겠는가.

 

나 또한 이러한 자에게 속지 않으려고 본 학문에 입문하였는데 워낙 둔재라 지금까지도 오리무중이니 이학문이 얼마나 어려운 학문인가를 다시 한번 느끼게 한다. 명사가 되겠다는 각오로 열심히 배우고 또 배우면 언젠가는 개안할 날이 올 것 아니겠는가 하는 희망을 가지고 정진하여 보려고 한다.

 

 

 Copyright ⓒ 한국현문풍수지리학회 All Rights Reserved.

서울 종로구 세종로동 80-1 세종로공원 주차장 지하1층 아케이드

Tel : 02)735-9590    Fax : 734-1438

E-Mail : hyeonmun@hyeonmun.co.kr

 

영탑사 범종

 

소 재 지 :  면천면 성하리 560

지정내용 : 문화재자료 219호

지정일자 : 1984. 5. 17 지정

규    모 :  높이 60㎝

              상대부분 지름  31㎝

              하대부분 지름  46㎝

              하대부분 두께  4㎝

   이 종의 크기는 용두까지의 높이가 60cm이고 상대부분의 지름이 31cm, 하대 부분의 지름이 46cm밖에 안 되는 종으로 하대쪽의 두께는 4cm정도이다.

 

이 종에는 『1760년 2월 가야사 법당 금종을 백근으 금을 녹여 만든다(乾隆25年 庚辰2月 伽倻寺法堂金鍾百斤金入重造成也)』라는 기록이 있고 덕산, 홍주, 면천의 시주한 신도들의 이름이 있다.  가야사는 흥선대원군이 당신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李球. 1788-1836)의 묘를 쓰기 위해 불태운 절이다.  어떻게 해서 그 절의 금종이 이  곳으로 오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http://www.djtimes.co.kr/asset_do12.htm

http://www.tangjin-gun.chungnam.kr/dangjin/main/travel/travel-02/23.htm

 

울산김씨-여흥민씨

 


  칠장사